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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헌 목록 〉11. 11世 〉15. <부정공>연담기(蓮潭記)휘이(諱怡)
1. 문헌 목록 〉11. 11世 〉17. <부정공>우윤공유사(右尹公遺事)휘연(諱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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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부정공>수의부위훈련원봉사공휘각유사(修義副尉訓練院奉事公諱珏遺事)
修義副尉訓練院奉事公珏遺事 府君諱珏字伯榮姓趙氏淳昌人鼻祖高麗侍中諱璋歷四世諱元吉號農隱與鄭圃隱共靖王室官侍中封玉川君諡忠獻生諱瑜時人不知通喪之制百日即吉獨居三年親負土而葬 太祖龍興徵不應命隱虔谷而自號 太宗曰前副正趙瑜有採薇之志 世宗命給守塚三戶且旌其孝渼湖金文敬公所撰墓表具載其事而日宋祭酒秉璿亦作碣銘至孫縣監諱智崑四兄弟築相好亭而處孝義著于世寔公高祖也曾祖諱和司直祖諱介臣監察考諱大承字克紹 明廟壬戌行朝奉大夫司憲府監察通訓大夫乙丑除泰仁縣監到郡數月治化隆洽民各安所大小同樂立碑頌德越明年丁卯聞 明廟賓天之報北望痛哭辭職治裝吏民隸僕含涙挽車百拜遠餞匹馬單盖歸臥古里養鷄種黍以終餘年妣令人朔寧崔氏參奉康濟女府君生于 宣廟十一年戊寅十二月五日天資厚重氣質粹明讀書講武潜心尊力事親奉祭盡誠勤禮立心行己一以古人爲期臨事勇斷接人溫恕膽畧英邁氣宇磊落恢恢然濟世之經綸凛凛乎蹈海之節義當時賢士大夫尊敬欽慕稱以公輔器才又甞自奮發曰爲學不聞道事君不盡忠生無成業死不遺芳何以立於天地也哉吾將砥柱乎江河棟樑乎宇宙矣暨萬曆三十一年癸卯登武科行秉節校尉龍驤衛副司果訓練院奉事翌年甲辰二月十九日遭外艱累日星行得抵喪次殯塗己成撫樞痛哭屢至絶甦見者垂涕聞者傷心四日不怠宗族親戚強勸糜粥稽顙泣曰吾哀我父母生我一孤劬勞恩德天地高厚不肖此身誤貪榮利久遊遠方曠闕定省癠未侍床奉湯歿不襲奠飯含今來至此形不復見覆載間一罪人何敢食飲以救頑命耶尊命雖重吾所不忍牢拒伏哭擧家深憂更陳傷生失正之義屢屢哀喻又賴令人強之仍出次苫席強加水飲哭泣過度哀毀踰節不食酒肉不脱衰経越明年乙巳令人又患泄痢數月呻吟問醫劑樂祈天禱神各盡其方或加或愈十月十二日竟也見背號哭擗痛晝夜無一時息嬴疾果作難保喘息權進肉味呑哇再三推器號泣吿于諸家人曰孤不孝罪己深矣死生在天食此何爲順天而己更勿復進痛哀不懈疾隨而劇幾至屬纊哀吿宗親曰吾命將盡奈何奈何親喪未除莫大之罪罔極之痛何事可贖何時可泄子嬰襁褓何以保養孰能導化克承先業將屬後事生來營營今皆成空三十年光於焉一夢嗚呼哀哉天也奈何嗚呼哀哉天也奈何言未己而死即 宣廟三十九年丙午二月十一日也壽二十九嗚呼府君篤行峻節早年沒世不幸者二講道不久無以充發紐之誌一也居位不尊無以蒙推毂之恩二也踰月而葬于順天府之北住巖面鼓巖洞壬坐原親戚知舊操文赴哭者數百人配宜人泰仁許氏章陵參奉縉女 宣廟癸未二月十八日生卒年未詳而己則六月二十七日也墓祔天性仁孝和順婦德甚茂六親取法生一男二女子義吉通德郎娶恭人張氏兵曹判書忠毅公潤孫女木川人長壻安時穆順興人子安琥次壻金弘運慶州人子金聲宇金聲五武科孫二人時耈時鼎曾孫四人維春維夏維憲時耈子維城時鼎系子自谷城系焉吁其悲矣于今數百載屢怯兵燹子孫貪寒文獻遺漏巾衍所藏畧畧可攷然曾無以八於立言采擇而修潤之爲其后孫者遠誠之感謂其如何哉今將竪石于墓下竊欲昭揭幽光有辭後世故敢忘陋拙撮其萬一好懿德者庶有觀感而興嘆也哉嗚呼悲夫 時永曆五戊戌孟冬下澣 十代孫 炳寬 謹識 수의부위훈련원봉사공각유사(修義副尉訓練院奉事公珏遺事) 부군의 휘는 각(珏)이요, 자는 백영(伯榮)이며, 성은 순창 조 씨인데 시조는 고려 시중 휘 장(璋)이요, 二세를 지나 휘 원길(元吉)은 호가 농은(農隱)인데 정포은과 더불어 함께 왕실을 편안히 한 공으로 시중의 벼슬에 옥천군을 봉하고 시호는 충헌(忠獻)이며 유(瑜)는 그 당시 사람이 상례(喪禮)가 문란하여 백 일 만에 탈복하는데 홀로 三년을 거상하며 친히 흙을 져다 장예를 모시고 태조(太祖)가 창업하고서 불러도 응하지 않고 건실마을에 숨어 스스로 건곡(虔谷)이라 호하였다. 태종(太宗)은 「전부정 조 유가 백이숙제가 고사리를 캐먹으며 지키던 청백함이 있다.」고 말씀하셨고, 세종(世宗)은 「묘지기 三호를 주라.」고 명하였으며 또 그의 효성을 정문으로 포양하니 미호(渼湖) 김문경공(金文敬公)이 찬술한 묘표에 그 사실을 갖추어 기재하였고, 그다음에 제주(祭酒) 송병선(宋秉璿)이 갈명을 찬술하였다. 손자 현감 지곤(智崑)은 네 형제가 상호정을 짓고 효우로 처신한 것이 세상에 저명하였으니 곧 공의 고조였다. 증조 휘 화(和)는 사직(司直)이요, 조 휘 개신(介臣)은 감찰(監察)이며, 고 휘 대승(大承)은 자가 극소(克紹)이고 명종(明宗) 임술년(一五六二)에 조봉대부 사헌부감찰 통훈대부(朝奉大夫司憲府監察通訓大夫)를 행직하다가 을축년에 태인현감(泰仁縣監)을 제수받고 도임한 지 두어 달에 정치가 화흡하니 백성이 각기 자기 본분을 얻어 모두가 함께 즐거워하며 비를 세워 송덕하였다. 다음 정묘년에 명종(明宗)이 승하하였다는 말을 듣고 북녘을 바라보고 통곡하며 벼슬을 버리고 행장을 수습하니 고을 백성이 눈물을 머금고 수레를 끌며 멀리 전송하였다. 말 한 필과 가마 한 채로 고향에 돌아와서 닭을 기르고 농사를 지으며 남은 생을 마쳤다. 비는 영인 삭녕 최 씨(朔寧崔氏) 참봉 강제(康濟)의 딸이었다. 부군이 선조(宣祖) 十一년(一五七八) 무인 十二월 五일에 출생하였다. 천자(天資)가 두텁고 무거우며 기질이 맑고 밝아 마음을 안정하고 힘을 오로지 하여 글을 읽고 병서를 강론할 때는 마음을 잠잠히 하고 또 힘썼으며 어버이를 섬길 때나 제사를 받들 때 정성과 예절을 다하는 등 바르게 하고 몸을 닦기를 옛사람같이 하였다. 일에 임하면 용단력이 있고 사람을 대할 때면 온화하고 담략이 영준하고 기우가 명쾌하여 세상을 건질 경륜이 풍부하고 바다를 건널 만한 노중년(魯仲連)의 절의가 있었으니 당시 사대부들이 존경하고 흠모하며 보필의 기재라 칭도하였다. 또 일찍이 스스로 분발하여 말하되 「학문을 하여 도를 듣지 못하고 인군을 섬기되 충성을 다하지 못하며 살아서 업을 이루지 못하고 죽어서 이름을 전하지 못하면 어찌 천지간에 용납하리오, 나는 장차 강하(江河)의 초석이 되며 우주의 대들보가 되리라.」 하더니 만력(萬曆) 三十一년(一六0三) 계묘년에 무과에 올라 병절교위 용양위 부사과 훈련원봉사(秉節校尉龍驤衛副司果訓練院奉事)를 행직하고 다음해 갑진년(一六0四) 二월 十九일에 부친상을 당하여 여러 날 밤길을 걸어 상차에 득달하니 이미 빈염이 된 지라 널을 어루만지고 통곡하며 자주 숨이 끊어졌다가 다시 소생하니 보는 자 눈물을 흘리고 들은 자는 마음 아파하기도 했다. 四일간 식음을 전폐하고 애절하는 모습을 본 가족과 친척이 미음과 죽을 강권하니 이마를 숙이고 통곡하며 가로되 「슬프다! 우리 부모 내 한 몸을 기르며 애쓰신 은덕은 하늘같이 높고 땅같이 두터운데 불초한 이 몸이 그릇되게 영리(榮利)를 탐내어 오랫동안 원방에서 노닐며 정성(定省)을 궐하고 병환에 시탕을 못하였으며 별세하여서 염습 반함을 못 하였으니 천지간에 죄인이라 어찌 감히 먹고 마시어 목숨을 구하리오, 인명이 비록 중하나 나는 차마 못하겠다.」 하고 완강하게 물리치고 통곡하니 온 집안이 깊이 근심하여 다시 양생송사(養生送死)의 뜻을 가지고 개유하고 또 모부인의 강권으로 상차에 나와 미죽을 먹었으나 곡읍이 과도하고 슬픔이 예제에 지나쳐 술과 고기를 먹지 아니하며 최복과 질대를 벗지 아니하였다. 일 년이 지난 을사년(一六0五)에 모부인이 이증으로 여러 달을 신고하니 약을 쓰고 천신에게 기도하며 여러 가지로 정성을 다하니 혹은 덜하고 더하기도 하다가 十월十二일에 마침내 별세하시니 밤낮으로 호곡하고 가슴을 두드리고 슬퍼하다가 병이 들고 지쳐 천식을 보존하기 어려우므로 권도로 육미를 권하니 재삼 토하고 삼키다가 울며 집안사람에게 말하되 「나의 불효한 죄가 이미 깊은지라 죽고 사는 것은 하늘에 달렸으니 다시 권하지 말라.」 하고 애통해하니 병이 따라서 위극하여 거의 사경에 이른지라 슬피 종친에게 고하여 가로되 「내 목숨이 장차 다하니 어찌할까, 모친상을 다 받질지 못한 막대한 죄와 망극한 슬픔을 무슨 일로 속죄하며 어느 때에 이를 씻을 것인가, 어린 자식이 강보에 싸였으니 누가 기르고 뉘가 가르쳐 선업을 이으며 어찌 장차 후사를 부탁할꼬, 평생 경영이 이제 다 허사가 되니 三十년 세월이 어느덧 한 꿈이로다. 아! 슬프다, 하늘이여, 이 일을 어찌할꼬 어찌할꼬」 하다가 말을 마치지 못하고 별세하니 곧 선조(宣祖) 三十九년(一六0六) 병오 二월十一일이요, 향년 二十九세였다. 아! 부군이 독실한 행의와 높은 절의로 조년에 별세하고 보니 불행한 점이 두 가지이다. 도를 강마한 지가 오래지 아니하므로 문집을 발간할 뜻을 채우지 못한 것이 하나요, 높은 직위에 오르지 못하여 거천(擧薦)한 은혜를 못 입은 것이 둘이로다. 달을 넘겨 순천부의 북쪽 주암면 북바위 임좌원에 장사하니 친척과 벗이 만장을 가지고 다다라 곡한 자가 수백 사람이었다. 배는 의인 태인 허 씨(泰仁許氏) 장릉 참봉(章陵參奉) 진(縉)의 딸로 선조(宣祖) 계미년(一五八三) 二월十八일에 출생하였는데 사망한 해는 미상이고 제삿날은 六월二十七일이며 묘소는 부장이었다. 천성이 인효화순(仁孝和順)하고 부덕이 순비하여 육친이 모범을 삼았다. 一남 의길(義吉)은 통덕랑으로 공인 목천 장 씨를 취하였는데 병조 판서 충의공(忠毅公) 윤(潤)의 손녀이고, 큰사위는 순흥(順興) 안시목(安時穆)인데 그 아들은 안호(安琥)요, 둘째사위는 경주(慶州) 김홍운(金弘運)으로 그 아들은 김성우(金聲宇), 김성오(金聲五) 무과이며, 손자는 시구(時耈), 시정(時鼎)이고 증손 유춘(維春), 유하(維夏), 유헌(維憲)은 시구의 아들이고, 유성(維城)은 시정의 계자인데 곡성파에서 양입(養入)하였다. 아! 슬프도다. 이제 수백 년에 자주 병화를 겪고 자손이 빈한하여 문헌이 산실되고 책장에 보관해 둔 게 다소 상고할 수는 있으나 일찍 입언군자의 채택한 바 없으니 그 후손 된 자의 감개가 어떠하겠는가, 이제 돌을 묘소 아래에 세우고 사사로이 그윽한 빛을 밝게 걸어 후세에 남기려 하므로 감히 누졸함을 잊고 만일을 모아 기록한다만 그 아름다운 덕을 좋아한 자가 보고 감탄을 일으킬 수 있을 것인지 아, 슬프다. 十대손 병관 삼가 기록함(十代孫 炳寬 謹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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